느림보 이방주 2013. 5. 8. 06:45

有朋이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아

공자는 왜 자신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오는 사람들을 제자라 하지 않고 벗이라 했을까?

저녁에 구룡산에 올랐다. 밤 공기가 상쾌하다. 세상은 어지러워도 산은 항상 청정하다. 산은 산이기 때문이다. 산을 부동산으로 보는 순간 청정을 잃는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성철 스님의 일갈은 존재의 본질을 짚었기에 곱씹을수록 명쾌하다.

모든 일은 목적을 본질에 두어야 역사로부터 지탄받지 않는다.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교육의 성과를 대상의 변화에 두어야지 주체에게 두는 순간 염불이 아니라 잿밥이 된다. 그건 사명이 아니라 야망이다. 야망을 가진 교사는 역사에 드러날 수는 있겠지만, 스승으로 남지는 못한다. 그런데도 국가는 교육의 결과에 성과급을 내리고 인센티브를 주고 현수막을 내건다. 잿밥을 지향하라 권장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산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육자들도 옛 선비처럼 물을 바라보아야 한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역사라는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공자는 자신의 사고에 늘어붙지 않았다. 가르침이란 논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학문은 배우고 묻는 것이 본질이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학문'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제자를 벗으로 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가르침의 결과가 공자에게 돌아갈 리가 없다. 제자는 제자가 하니라 학문의 벗이다.

(2013. 5.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