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내 어떤 학교의 교문을 들어서다가 가슴이 뭉클한 적이 있다. 20여 개 계단을 막 올라서자 이마에 부딪치듯 다가오는 경구(警句) 때문이었다.
"미래를 꿈꾸는가, 그러면 준비하라"
일반계 여자고등학교인 이 학교 학생들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걸음은 빠르고 활기찼다.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성세대로서, 미래를 준비하는 아이들을 도와주는 교사로서 회의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사회는 알차게 준비하는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기대하는 만큼의 미래를 내어 줄 수 있을까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각오로 매진하라고 채찍을 가하기도 하고,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며 무책임한 격려를 보내기도 하지만 비어 있는 마음 한 구석을 진정할 길이 없다.
최근 고등학교 3학년 아이들에게 자신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를 물은 적이 있다. 그런데 아이들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대부분이 확실하지도 않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바보가 누가 있겠냐는 것이었다. 기대 밖의 대답을 듣고 어느 교수처럼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라고 설득하려고 했다. 너희들의 미래는 오늘과는 달리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이라고 설득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설득의 말을 꺼낼 수조차 없는 무능한 교사가 되어 있었다.
오늘날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불신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아무리 노력해도 화려한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다 알고 있다. 그러면 미래를 보장 받는 사람은 누구라는 것인가. 자본가의 아들만이 본부장으로 낙하산을 탈 수 있고, 정치가의 자식이 정치가가 되기 수월하고, 공기업은 이미 근무하고 있는 부모가 자리를 자식에게 물려준다는 것이다. 노력하여 자수성가하기보다 부모가 정치권력이든 경제 권력이든 쥐고 있어야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고등학교만 졸업하고도 법관이 될 수 있었던 시대는 지나갔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은 옛말이 되어 버렸다. 개천의 미꾸리는 용이 될 꿈을 꾸기보다 얕은 물에서 돌 틈을 기어 다니며 거친 먹이나 찾는 것이 현명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아이들을 설득할 길이 없다. 주변의 어려움 속에서 성공한 인사들을 들어가며 설득하려해도 아이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이 젊은 날에 해보고 싶은 것을 다 해보면서 살겠다면서 선생의 설득을 비웃었다. 현재의 모습을 보고 미래 사회를 예단해 버리면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안간힘을 다했지만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왔다.
최근에 어떤 공직자 임명 국회 청문회를 보면서 나는 아이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승용차 홀짝제를 피하기 위해 관용차를 겹으로 사용하고, 공금을 자녀들의 학자금으로 사용하는 것을 관행이라 하고, 해외 출장에 아내는 비서, 딸은 수행원으로 동반하기도 했단다.?경력도 없는 딸을 대기업에 경력자로 취업시켰다고 하여 충격을 주었다. 모든 것은 관행이고 짧은 생각이었다고 형식적 사과로 우리를 분노하게 했다.
회초리로 가르치는 시대는 지나갔다. 정당한 사회가 아이들을 바르게 가르칠 수 있다. 본질에 충실하고 제자리를 바로 찾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재벌의 불법 상속, 가진 자들의 독점과 세습, 후안무치한 드라마로는 아이들을 설득할 수 없다. 비합리적인 권력이 합리를 비웃을 때 아이들은 좌절한다.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건전할 때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한다.
새 정부는 개천에 있는 젊은이들에게도 등용문을 열어 주어야 한다. 미래에 대한 확신 갖도록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 현재를 희생하면 바다로도 나가고, 하늘에도 오를 수 있다는 신뢰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사랑하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현재를 희생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용기를 갖게 될 것이다.
미래를 믿지 못하는 아이들
미래를 믿지 못하는 아이들
청주시내 어떤 학교의 교문을 들어서다가 가슴이 뭉클한 적이 있다. 20여 개 계단을 막 올라서자 이마에 부딪치듯 다가오는 경구(警句) 때문이었다.
“미래를 꿈꾸는가? 그러면 준비하라”
일반계 여자고등학교인 이 학교 학생들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걸음은 빠르고 활기찼다.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성세대로서, 미래를 준비하는 아이들을 도와주는 교사로서 회의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사회는 알차게 준비하는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기대하는 만큼의 미래를 내어 줄 수 있을까?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각오로 매진하라고 채찍을 가하기도 하고,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며 무책임한 격려를 보내기도 하지만 비어 있는 마음 한 구석을 진정할 길이 없다.
최근 고등학교 3학년 아이들에게 자신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를 물은 적이 있다. 그런데 아이들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대부분이 확실하지도 않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바보가 누가 있겠냐는 것이었다. 기대 밖의 대답을 듣고 어느 교수처럼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라고 설득하려고 했다. 너희들의 미래는 오늘과는 달리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이라고 설득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설득의 말을 꺼낼 수조차 없는 무능한 교사가 되어 있었다.
오늘날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불신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아무리 노력해도 화려한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다 알고 있다. 그러면 미래를 보장 받는 사람은 누구라는 것인가? 자본가의 아들만이 본부장으로 낙하산을 탈 수 있고, 정치가의 자식이 정치가가 되기 수월하고, 공기업은 이미 근무하고 있는 부모가 자리를 자식에게 물려준다는 것이다. 노력하여 자수성가하기보다 부모가 정치권력이든 경제 권력이든 쥐고 있어야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고등학교만 졸업하고도 법관이 될 수 있었던 시대는 지나갔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은 옛말이 되어 버렸다. 개천의 미꾸리는 용이 될 꿈을 꾸기보다 얕은 물에서 돌 틈을 기어 다니며 거친 먹이나 찾는 것이 현명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아이들을 설득할 길이 없다. 주변의 어려움 속에서 성공한 인사들을 들어가며 설득하려해도 아이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이 젊은 날에 해보고 싶은 것을 다 해보면서 살겠다면서 선생의 설득을 비웃었다. 현재의 모습을 보고 미래 사회를 예단해 버리면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안간힘을 다했지만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왔다.
최근에 어떤 공직자 임명 국회 청문회를 보면서 나는 아이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승용차 홀짝제를 피하기 위해 관용차를 겹으로 사용하고, 공금을 자녀들의 학자금으로 사용하는 것을 관행이라 하고, 해외 출장에 아내는 비서, 딸은 수행원으로 동반하기도 했단다. 경력도 없는 딸을 대기업에 경력자로 취업시켰다고 하여 충격을 주었다. 모든 것은 관행이고 짧은 생각이었다고 형식적 사과로 우리를 분노하게 했다.
회초리로 가르치는 시대는 지나갔다. 정당한 사회가 아이들을 바르게 가르칠 수 있다. 본질에 충실하고 제자리를 바로 찾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재벌의 불법 상속, 가진 자들의 독점과 세습, 후안무치한 드라마로는 아이들을 설득할 수 없다. 비합리적인 권력이 합리를 비웃을 때 아이들은 좌절한다.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건전할 때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한다.
새 정부는 개천에 있는 젊은이들에게도 등용문을 열어 주어야 한다. 미래에 대한 확신 갖도록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 현재를 희생하면 바다로도 나가고, 하늘에도 오를 수 있다는 신뢰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사랑하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현재를 희생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용기를 갖게 될 것이다.
(2012.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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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미래를 믿지 못하는 아이들
이방주 수필가
데스크승인 2013.01.28 지면보기 | 20면
충청투데이 | cctoday@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