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려가는 소
아침부터 집안 공기가 무겁다. 이런 날은 큰 소리를 내서도 안 된다. 할머니는 마루 끝에 앉아 연신 곰방대에 살담배를 담으신다. 화롯가에 담뱃재 떠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아버지의 기침소리도 가라앉는다. 공연히 미안한 어머니는 구정물에 쌀겨를 한 바가지 풀어 구유에 부어 준다. 물색 모르는 소는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기다란 혀로 날름날름 맛을 보더니 코까지 박고 들이켠다. 나는 까짓 팔려갈 소에 웬 쌀겨까지 먹이느냐고 투덜댔지만 기분은 마찬가지이다.
오늘 소가 팔려간다. 소를 팔아야 누나가 시집을 간단다. 어린 나는 누나가 시집가는데 소를 파는 이유를 잘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소를 팔아야 장롱도 사고 이불도 산다고 말했다. 소를 팔아야 잔치에 쓸 국수를 사고 술도 빚는다. 그래서 소를 판다고 한다. 소도 팔지 말고 누나도 시집 안가면 더 좋을 게 아닌가?
남들은 소를 생구(生口)라고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식구나 마찬가지이다. 이 녀석은 송아지 적에 우리 집으로 와서 어른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입 언저리에는 하얀 어미 젖이 묻어날 것 같이 보송보송했다. 고 귀여운 녀석이 보고 싶어서 자다가 일어나서 외양간에 가본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 어린 송아지가 무섭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한참을 외양간 앞에 앉아 있기도 했었다.
송아지가 맛나게 먹고 영양도 높은 먹이가 있었다. 이른바 소쌀나무라고 하는 자귀나무이다. 연한 새순을 잘라다가 쌀겨를 섞어 먹였더니 목덜미로부터 엉덩이까지 기름이 자르르 흘렀다. 눈가에 눈곱 낄 날도 없었다. 엉덩이에 포동포동하게 살이 붙어 똥 따까리가 저절로 떨어져 나갔다. 누런 엉덩이에 반질반질 윤이 났다.
아버지는 노간주나무를 베어다가 다듬고 다듬어 물에 불리고 불에 구워 코뚜레를 만들어 두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언제 뚫었는지 코를 뚫었다. 얼굴에 코뚜레를 떡하니 걸친 송아지는 의젓해 보였다. 처음으로 안경을 끼었을 때처럼 나이 들어 보였다. 생살에 생채기를 내어서인지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송아지라고 부르기 미안할 정도로 어른이 되어 있었다.
가족들과 그렇게 정이 든 채 몇 해 동안 송아지를 나아주고 농사일을 거들던 소를 팔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송아지를 길러 다시 어미소를 만들면 된다고 자꾸 위로했지만, 아프고 아까운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소는 그 장날에 쇠전에서 팔려갔다.
내가 무소를 살 때는 순전히 차가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전에 타던 차가 버릴 만큼 낡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당시에는 아주 호사스러운 사람만이 타던 무소가 멋있어 보여 허영심을 자제할 길이 없었다. 무소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가장 멋있는 사람이고, 부귀영화를 다 누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무소가 아닌 차는 차로 보이지도 않았다. 어린애들처럼 탈 없이 잘 굴러가는 차가 원망스러웠다.
무소를 향한 목마른 소망은 달랠 길이 없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타던 차가 버릴 단계도 아니었고, 값이 만만찮아 내게는 어울리지도 않았다. 독하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타던 차를 어느 정도 수리하면서 다시는 정말로 다시는 무소를 바라보지도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해 보니 자동차 외판원이 와서 아내와 무소 구입 절차를 상의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고마웠지만 겉으로는 펄펄 뛰었다. 그러나 바로 계약서에 서명하고 말았다.
차는 바로 들어왔다. 드디어 우리 아파트 마당에도 무소 한 마리를 기르게 되었다. 검고 육중하며 거대한 야생의 무소가 초원으로 내달릴 태세를 보였다. 나는 서재에서 잘 보이는 곳에 주차하고 틈만 나면 창 너머로 내다보았다. 검은 보닛에 푸른 하늘이 담긴 모습은 청아하기까지 했다. 그토록 선망하던 차를 남들이 선망할 것을 생각하니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처음에는 생각처럼 무직해서 운전이 어렵고, 출발이 둔해서 잠시 후회했지만 바로 몸에 익숙해졌다. 지방으로 출퇴근할 때라 시내를 벗어나 한번 탄력을 받으면 바람을 헤치고 들판을 질주하는 사나운 짐승이 되었다. 차체가 높아 시야가 탁 트인다. 세상이 다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기분이다. 운전에 두려움도 없었다. 아무리 먼 거리를 갈 때도 어려움이 없었다. 두려움이 없으니 정신적 피로도 없다. 탈수록 정이 들었다. 게다가 15년을 안 간데 없이 마구 타고 돌아다녔어도 투정 한번 부리지 않았다. 부품 하나하나가 모두 움직이는데 문제가 없었고, 소모품의 수명도 지루할 정도로 길었다. 무소는 내 몸의 일부처럼, 명령을 기다리는 충복처럼 항상 곁에 있어 주었다.
열다섯 해나 나를 실어 나르던 충성스러운 시종에게 새 주인이 나타났다. 내게는 자식들이 새 차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오늘 아버지 산소에 가는 길에 새 주인에게 나의 충복을 끌어다 주기로 했다. 기다리던 새 주인에게 무소의 열쇠를 넘기고 아들의 차에 오르며 돌아보니 울적한 마음을 가다듬을 길이 없었다. 낡았다고 팽개쳐 버리는 속물 같은 내 꼭뒤가 부끄러웠다. 꼭 팔려가는 소가 모롱이를 돌아서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던 어린 시절에 겪은 아득한 절망감처럼 씁쓸하기만 했다. 그때 그 시절 소를 팔고 돌아서던 아버지 마음도 꼭 이랬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선산으로 향했다.
(2011. 10. 15)
아침부터 집안 공기가 무겁다. 이런 날은 큰 소리를 내서도 안 된다. 할머니는 마루 끝에 앉아 연신 곰방대에 살담배를 담으신다. 화롯가에 담뱃재 떠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아버지의 기침소리도 가라앉는다. 공연히 미안한 어머니는 구정물에 쌀겨를 한 바가지 풀어 구유에 부어 준다. 물색 모르는 소는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기다란 혀로 날름날름 맛을 보더니 코까지 박고 들이켠다. 나는 까짓 팔려갈 소에 웬 쌀겨까지 먹이느냐고 투덜댔지만 기분은 마찬가지이다.
팔려가는 소
<에세이 뜨락> 이방주
2011년 11월 17일 (목) 21:45:11 지면보기 10면
중부매일 jb@jbnews.com
오늘 소가 팔려간다. 소를 팔아야 누나가 시집을 간단다. 어린 나는 누나가 시집가는데 소를 파는 이유를 잘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소를 팔아야 장롱도 사고 이불도 산다고 말했다. 소를 팔아야 잔치에 쓸 국수를 사고 술도 빚는다. 그래서 소를 판다고 한다. 소도 팔지 말고 누나도 시집 안가면 더 좋을 게 아닌가?
남들은 소를 생구(生口)라고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식구나 마찬가지이다. 이 녀석은 송아지 적에 우리 집으로 와서 어른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입 언저리에는 하얀 어미 젖이 묻어날 것 같이 보송보송했다. 고 귀여운 녀석이 보고 싶어서 자다가 일어나서 외양간에 가본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 어린 송아지가 무섭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한참을 외양간 앞에 앉아 있기도 했었다.
송아지가 맛나게 먹고 영양도 높은 먹이가 있었다. 이른바 소쌀나무라고 하는 자귀나무이다. 연한 새순을 잘라다가 쌀겨를 섞어 먹였더니 목덜미로부터 엉덩이까지 기름이 자르르 흘렀다. 눈가에 눈곱 낄 날도 없었다. 엉덩이에 포동포동하게 살이 붙어 똥 따까리가 저절로 떨어져 나갔다. 누런 엉덩이에 반질반질 윤이 났다.
아버지는 노간주나무를 베어다가 다듬고 다듬어 물에 불리고 불에 구워 코뚜레를 만들어 두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언제 뚫었는지 코를 뚫었다. 얼굴에 코뚜레를 떡하니 걸친 송아지는 의젓해 보였다. 처음으로 안경을 끼었을 때처럼 나이 들어 보였다. 생살에 생채기를 내어서인지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송아지라고 부르기 미안할 정도로 어른이 되어 있었다.
가족들과 그렇게 정이 든 채 몇 해 동안 송아지를 나아주고 농사일을 거들던 소를 팔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송아지를 길러 다시 어미소를 만들면 된다고 자꾸 위로했지만, 아프고 아까운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소는 그 장날에 쇠전에서 팔려갔다.
내가 무소를 살 때는 순전히 차가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전에 타던 차가 버릴 만큼 낡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당시에는 아주 호사스러운 사람만이 타던 무소가 멋있어 보여 허영심을 자제할 길이 없었다. 무소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가장 멋있는 사람이고, 부귀영화를 다 누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무소가 아닌 차는 차로 보이지도 않았다. 어린애들처럼 탈 없이 잘 굴러가는 차가 원망스러웠다. 무소를 향한 목마른 소망은 달랠 길이 없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타던 차가 버릴 단계도 아니었고, 값이 만만찮아 내게는 어울리지도 않았다. 독하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타던 차를 어느 정도 수리하면서 다시는 정말로 다시는 무소를 바라보지도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해 보니 자동차 외판원이 와서 아내와 무소 구입 절차를 상의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고마웠지만 겉으로는 펄펄 뛰었다. 그러나 바로 계약서에 서명하고 말았다.
차는 바로 들어왔다. 드디어 우리 아파트 마당에도 무소 한 마리를 기르게 되었다. 검고 육중하며 거대한 야생의 무소가 초원으로 내달릴 태세를 보였다. 나는 서재에서 잘 보이는 곳에 주차하고 틈만 나면 창 너머로 내다보았다. 검은 보닛에 푸른 하늘이 담긴 모습은 청아하기까지 했다. 그토록 선망하던 차를 남들이 선망할 것을 생각하니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처음에는 생각처럼 무직해서 운전이 어렵고, 출발이 둔해서 잠시 후회했지만 바로 몸에 익숙해졌다. 지방으로 출퇴근할 때라 시내를 벗어나 한번 탄력을 받으면 바람을 헤치고 들판을 질주하는 사나운 짐승이 되었다. 차체가 높아 시야가 탁 트인다. 세상이 다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기분이다. 운전에 두려움도 없었다. 아무리 먼 거리를 갈 때도 어려움이 없었다. 두려움이 없으니 정신적 피로도 없다. 탈수록 정이 들었다. 게다가 15년을 안 간데 없이 마구 타고 돌아다녔어도 투정 한번 부리지 않았다. 부품 하나하나가 모두 움직이는데 문제가 없었고, 소모품의 수명도 지루할 정도로 길었다. 무소는 내 몸의 일부처럼, 명령을 기다리는 충복처럼 항상 곁에 있어 주었다.
열다섯 해나 나를 실어 나르던 충성스러운 시종에게 새 주인이 나타났다. 내게는 자식들이 새 차를 마련해 준다고 한다. 오늘 아버지 산소에 가는 길에 새 주인에게 나의 충복을 끌어다 주기로 했다. 기다리던 새 주인에게 무소의 열쇠를 넘기고 아들의 차에 오르며 돌아보니 울적한 마음을 가다듬을 길이 없었다. 낡았다고 팽개쳐 버리는 속물 같은 내 꼭뒤가 부끄러웠다. 꼭 팔려가는 소가 모롱이를 돌아서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던 어린 시절에 겪은 아득한 절망감처럼 씁쓸하기만 했다. 그때 그 시절 소를 팔고 돌아서던 아버지 마음도 꼭 이랬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선산으로 향했다.
▶'한국수필' 신인상(1998), 충북수필문학상(2007) 수상
▶한국수필작가회 회원, 내륙문학회원, 충북수필문학 회원
▶충북수필문학회 주간 역임, 내륙문학회장 역임
▶수필집 '축 읽는 아이', '손맛', 칼럼집 '여시들의 반란', 편저 '우리 문학의 숲 윤지경전'
▶충북고등학교 교사
▶nrb200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