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일기 49 - 은강이 선물
2011년 2월 22일
시를 쓰는 은강이의 선물
산국관 앞에서 은강이를 만났다. 오늘은 통기타를 메고 있다. 자습 시간 중일 텐데 밖에 나와서 돌아 다닌다. 그의 사고는 늘 자유스럽다.
"은강아 오늘은 웬 기타야?"
그 물음에 대답은 않고 대뜸 되묻는다. 따지는 말투이다.
"이제 가세요? 아이리스는 공중 분해되는 건가요?"
"아냐 문학 동아리는 원래 너희가 계획하고 행사를 벌이는 거야. 이제부터 그렇게 해라. 4기 기장인 리향이를 잘 가르쳐서 그렇게 해야 한다."
愚子는 몇 가지 당부할 일들을 나열했다. 선생님의 무책임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는 귀넘어 듣는 듯했다. 다 버리고 떠나면서 무슨 뒷말이 많으냐고 생각하는 것 같아 자리를 황급히 떠났다. 그의 눈빛에 뒤통수가 따갑다.
은강이는 그림을 그리는 아가이다. 원래 디자인을 했는데 서양화로 바꾸었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의 그림에 크게 관심을 가져 본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림 뿐만 아니라 시를 쓰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상상력을 가진 은강이 시는 백일장에 나가면 번번히 낙방이다. 어른들을 놀라게 하는 그의 시가 백일장에서 한 번도 인정받지 못했다. 아무도 그의 시를 여고생의 시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백석이나 이상 같은 시인을 닮았다. 백석의 시를 다듬어 놓은 것 같다. 이상의 시가 현대라는 시간에 뛰어 내려온 것 같다. 저녁마다 김지하 시인이 시를 가르치고 갔나 의심스럽다. 그의 오늘의 시는 이상의 시처럼 한 20년 후 화제가 될 지 모른다.
愚子는 은강이를 등단시켜 보려고 문단의 요인에게 시를 보여 보았다. 핀잔만 들었다. 선생님은 이런 아이를 그냥 두셨습니까? 지도 받은 흔적이 하나도 없지 않아요. 이렇게 훌륭한 아이를 버려두다니---. 혀를 찼다. 그러나 愚子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어 부끄럽다.
그래도 핀잔을 들은 후 은강이를 불러 한 마디씩 잔소리를 했다. 그림을 그려 보아라. 언어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고 그림을 그려 보아라. 묘사도 해 보고 비유도 해 보아라. 세상의 아름다운 면을 찾아 보아라.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표현해 보아라. 뭐 이런 상투적인 이야기이다. 그래도 愚子가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들이다. 용기를 낸 것이다. 그러나 愚子의 말에 반기를 들 듯 2월에 출간한 아이리스 5집에는 더욱 도전적인 시를 내놓았다.
愚子가 떠날 것을 예감했는지 종업식날 내 책상 앞에서 쭈뼛거리더니 수업에 늦게 들어왔다. 수업이 끝나고 자리에 가보니 낙관을 하나 새겨다 놓았다. 파란 옥돌에 음각으로 새겼다. 찍어 보니 못난 愚子의 얼굴이다. 더 못나게 그렸다. 아마 그에게 愚子가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림을 그려보랬더니 못난 愚子를 그려 선물로 준 것이다. 아 부끄럽다.
은강이는 내 반은 아니지만 모자란 愚子가 정말 가르칠 게 없었던 아이이다. 그래도 愚子의 수업 시간에는 일년 내내 뒤에 나가서 선 채로 경청해 주었다. 내 시간에 그의 자리는 항상 졸음 책상이었던 것이다. 정말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