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일기 12 - 하자의 핸드폰
4월 어느날
저녁 시간에 하자가 찾아왔다. 집에 가야 한단다. 시내버스에 핸드폰을 놓고 내렸는데, 그냥 전화를 해 보았더니 시내 어떤 대학생이 주워서 보관하고 있단다. 그래서 찾으러 가야 한단다.
"여학생이야?'
"아니, 남학생이예요."
물론 안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랬더니 가서 만나야 전화기를 찾을게 아니냔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愚子가 사랑하는 하자를 늑대밥으로 내줄 수는 없다. 그런데 이 순진한 아가는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이다. 그래서 더 안 된다.
愚子는 가끔씩 작고 예쁜 눈을 들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순진 덩어리 하자에게 슬그머니 어깃장을 놓아 보았다.
"너 시내버스 타고 잘 생긴 대학생 있으니까 일부러 슬그머니 놓고 내린 것 아냐?"
"예, 그랬어요."
"정말"
"아이, 아녜요. 선생님."
"정말 아냐?"
아닌 줄 알면서 확인 또 확인했다.
愚子가 가면 안 되느냐니까 얼굴이 똥색으로 변한다. 무너지는 흙더미를 뒤집어 쓴 듯, 지나가는 자동차가 튀긴 똥물을 맞은 듯, 참던 방귀가 막 비어져 나올 때 처럼 낭패스런 표정이다.
전화기를 꺼내 검색을 했다. "ㅎㅅㅈ'을 치니 하자 전화번호가 그냥 뜬다. 통화 버튼을 누르니 젊은 목소리가 산골 샘물에 물방울 튀듯 통통 튀긴다. 愚子는 목소리를 눌렀다. 아주 상늙은이 목소리를 냈다. 그래야 그 쪽에서도 쉽게 포기한다. 그런데 그 학생은 의외로 점잖다.
"제가 찾아가서 전해 주어야 도리인데 시험 기간이라서 시간이 없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학생인가? 그냥 하자를 보내도 아무런 탈이 없을 것도 같았다.
"착실한 학생 같은데 보내 줄까?"
하고 바라보니 이 녀석 순딩이는 은근히 기대한다. 그러나 시험 기간이라지 않은가? 그러면 하자는 믿을 수 있을까? 글쎄이다. 믿을 수 없다. '오빠' 어쩌구 하며 엉길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 맞아. 愚子가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지.
좀 일찍 퇴근하여 그 학생이 산다는 개신동 원룸촌을 찾아가 골목에 차를 세워 놓고 다시 전화를 했다.
5분 정도 기다리니 학생이 나왔다. 아주 잘 생겼다. 키가 나보다 더 큰 데다가 셔츠 위로 드러나는 어깨와 가슴 근육이 가수 '비'을 뺨친다. 게다가 허리는 또 어떻고---- 완전히 역삼각형이다. 짧게 깎은 머리는 은행원처럼 깔끔하게 빗어 넘겼다. 얼굴도 맑고 깨끗하다. 요즘에는 공부만 했는지 다소 파리한 느낌도 들었다. 하자가 왔더라면 핸드폰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또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을 것이다.
밥이라도 먹으러 가자니까 시험 기간이라 바쁘단다. 시험기간이라도 밥은 먹어야 하지 않느냐니까 그럴 시간이 없단다. 그렇지 그렇게 대답해야지. 愚子 같은 꼰대하고는 가지 않겠다는 말이렸다. 愚子는 내가 아니고 이쁜 하자가 왔을 때 이 학생의 표정을 공연히 상상해 보았다. 가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한 번 강하게 권했다. 그랬더니 강하게 거절한다.
"죄송합니다. 하던 공부를 마무리해야 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뭐가 있겠어. 이 사람아. 고맙네."
이미 핸드폰을 건네 받은 愚子는 손해날 게 없었다. 애써 섭섭한 표정을 지으면서 재빠르게 핸들을 돌렸다.
정말 내가 오기를 잘했다. 하자도 좀 있으면 중간고사인데. 그 맘 여린 아가가 '개신동 비'를 만나고 나면 얼마나 마음이 혼란할 것인가?
잘했다. 정말 잘했어. 탁월한 선택이었어. 그러나 하자는 한 이틀 동안은 愚子를 쳐다볼 때 초승달처럼 눈이 꼬부라졌다. 愚子는 하자를 계속 놀렸다.
"일부러 핸드폰을 버스에 놓고 내렸지?"
"아가들아 너희도 하자마냥 멋진 대학생 보면 핸드폰 두고 내려라."
하자는 골이 여간해 풀어지지 않았다. 그럴수록 귀여운 놈.
그래도 의심많은 꼰대 기질이 나온다. 그 '개신동 비'란 대학생이 하자 번호를 저장해 두지는 않았을까? 愚子가 가기 전에 하자가 전화를 해서 번호를 물어 보지는 않았을까? 보답 어쩌구 하면서 말이야. 아니다. 그럴 리 없어. 하자는 믿을만한 아가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