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뜨락 -흐르는 강물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임형묵
방학기간이라 그런지 운동장엔 낯선 차량들이 자주 눈에 띈다. 특히 점심시간이면 정문을 가로막아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통행에 불편을 주기까지 한다. 도심 곳곳에 주차장이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의 공간에 일그러진 양심을 늘어놓는다.
지난 가을엔 정원에 심어놓은 모과를 털어간 황당한 일이 벌어졌었다. 모과를 따간 사람이 누구인지 굳이 알고 싶지는 않았다. 문제는, 학교 안에 있는 것은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니니' 보는 사람이 임자라고 생각하는데 있다. 모과를 털다 들키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게 현실이다.
벌건 대낮에 신작로에 심어 놓은 고염이나 사과를 버젓이 따고, 여럿이 찾는 공원에서 감을 떨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언론매체에서는 툭하면 인사 비리와 뇌물 사건이 터지고, 어느 누가 구속됐다고 대서특필이다. 공무원들이 쌀 직불금 부정 수령으로 선량한 농민들의 가슴을 울리고, 정부에서 일자리 창출을 목적으로 벌인 '희망 근로 사업'에 일부 공무원들이 개입해 말썽을 일으켰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공공의식의 부재, 퇴계 이황 선생의 일화가 생각나는 요즈음이다. 선생께서 단양 군수에서 물러나 행차가 죽령에 닿았는데, 같이 근무하던 직원이 등에 지고 온 마(麻)를 선생 앞에 내려놓으며 말씀드렸다."이 마(麻)는 관청 소유의 밭에서 수확한 것이므로, 예에 따라 사도께서 가져가셔야 합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선생은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어찌 네 마음대로 하느냐며 그것을 도로 가져가라고 직원을 타일렀다. 퇴계 선생은 그 뒤 풍기 군수로 부임했다가 물러날 때에도 하인이 지고 온 서책과 옷은 받으면서도 짐을 넣어온 옷장은 군의 소유물이라며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부패는 악의 꽃이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도 유혹에 물들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수렁에 빠져든다. 대수롭지 않을 거라 생각해도 이골이 나면 정신까지 황폐해진다. 부패는 자신뿐만 아니라 공직사회를 망친다.
우리나라가 그동안 선진국을 향해 나날이 도약하고 있지만, 국제투명성기구(TI)는 2009년도 대한민국의 부패인식지수(CPI)를 10점 만점에 5.5라고 발표했다. 조사 대상국 180개 중 39위로 2008년도보다 1계단 상승했다. 부패인식지수도 0.1점 소폭 하락하는데 그쳤다. 2007년과 비교해도 겨우 4계단 올랐으니 경제 성장 속도와 비교하면 할 말을 잃는다.
부패한 나라는 자동차 사고율도 높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부패가 만연하면 사회 곳곳이 병든다는 교훈이다. 한국, 인도, 방글라데시, 몽골 등 아시아 4개국에 살고 있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반부패인식지수를 조사한 자료를 보아도 정직하게 사는 것보다 부자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단다. 그 비율이, 인도는 8.4, 몽골은 9.1%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22.6%로 나타났다. 방글라데시의 3.1%보다 7배가 높다.
2008년 한국투명성기구가 조사한 청소년들의 '반부패 인식 조사'는 충격적이다. '나는 감옥에서 10년을 살아도 10억 원을 벌 수 있다면 부패를 저지를 수 있느냐'는 항목에 17.7%가 그렇다고 답했다. 숙제를 낼 때 인터넷 자료를 짜깁기했더라도 꼭 출처를 밝힐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도 35.3%가 동조했다. 청소년들은 부정부패를 목격해도 나에게 손해가 된다면 모른 체하며, 법을 어겨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있다. 청소년들 90%가 자신이 사는 대한민국마저「부패한 나라」로 보고 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지금 우리 현실은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배금주의가 만연되어 있다. 호적에 잉크가 마르지 않는 어린애가 세상을 알기도 전에 억만장자가 된다. 조용하던 시골이 '개발'의 이름을 달고 수많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돈 방석에 앉는다. 외국인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비웃는다. 한국의 부패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이라며 선진국으로 가기는 틀렸다고 쓴웃음 짓는다.
시골 동네를 여행하다 보면 낯 잊은 간판을 마주하게 된다. '광수네 가게', '혜자네 미용실'. 내 고향 동네에도 '윤가네 칼국수' 식당이 있다. 가게 이름이 무척 촌스럽지만 그들은 간판을 내리지 않는다.
왜 그네들이라고 촌티 나는 '혜자네'와 '광수'를 버리고 'NICE'나 'WONDERFUL' 간판을 달고 싶지 않겠는가. 목마른 일꾼들을 위해 텁텁한 막걸리를 갖다놓고,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맞춰 떡볶이와 스낵과자를 준비한다. 그네들은 간판보다 양심이 우선이고 떳떳함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가게를 비워두면서도 도둑이 드는 걸 염려하지 않는 게 그네들이다.
선진국가로 가려면 각종 부패방지 제도를 떠나 '내가 지키면 남도 지킨다'는 질서의식이 뿌리내려야 한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내 것이 아니면 탐하지 않는 '마음 비움'이 몸에 배야 한다. 방글라데시의 행복지수가 우리보다 높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흐르는 강물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직장이 맑으면 나라는 저절로 부자가 된다.' 라는 구호를 외치고 싶은 오늘이다. 모과는 외양이 똑 고르지 않고 울퉁불퉁 모가 나지만 속맛이 깊다. 겉모습은 엉성해도 맛과 향기가 일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