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뜨락 -산타의 명퇴-박종희
2009년 12월 25일
얼마 전 주말, 모임이 끝나고 돌아와 현관문을 여는데 집안에 인기척이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열쇠로 문을 여니 거실에 불이 꺼져 깜깜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데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칠흑 같은 어둠으로 덮여 있는 거실 한구석의 모니터에서 캐럴 송이 흐르고, 그 앞에 크리스마스 추리가 화려하게 서 있었다.
남편과 딸애가 추리를 만들어놓고 나를 놀라게 하려고 불을 끄고 방안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매년 연말이 되면 남편과 딸애는 지극정성으로 크리스마스 추리를 만든다. 딸애가 어릴 때부터 사용하던 큰 소나무 한 개와 작은 소나무 두 개는 딸애와 같이 나이를 먹어간다.
올해는 많이 바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살았는데 추리를 보니 가슴이 설렜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올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계획을 세우자고 하던 딸애의 말이 생각났다. 사실 산타를 퇴직한 4년 전부터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도 걱정이 없었다. 딸애에게 줄 선물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딸애는 혼자 자라서인지 영악하지 못하다. 언니나 오빠가 있는 조카들을 보면 초등학생이 되기도 전에 산타의 실체를 알아버리는데, 딸애는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딸애는 산타할아버지에 대한 환상이 컸다. 어릴 때부터 성탄절이 가까워지면 잠을 설치며 성탄절을 기다렸다.
매년 성탄절 새벽이면 딸애는 살금살금 거실로 걸어 나와 크리스마스추리 옆에 놓여 있는 선물을 가지고 들어간다. 그런 딸애의 모습을 지켜보며 남편과 나는 "올해도 완벽하게 속아 넘어가는군"라고 하며 딸애의 좋아하는 얼굴을 보는 것이 기쁨이었다. 딸애가 산타에게 바라는 선물은 해마다 달랐다. 어느 해인가는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심즈2'라는 게임 CD를 구하려고 남편은 서울로 나는 청주시내 완구점을 다 뒤지고 다니기도 했었다.
해마다 딸애가 원하는 선물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일도 큰일이었다. 남편과 서로 번갈아가며 딸애의 마음을 유도 심문하여 확실하게 선물을 알아놓아야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딸애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게 선물을 사다 놓으니 딸애는 정말 산타가 있다는 것을 철썩 같이 믿었던 것 같다.
가끔은 학교에서 친구들한테 산타는 없고 엄마, 아빠가 사다 놓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솔직히 말해달라고 조르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남편과 나는 "산타는 너의 마음속에 있다. 네가 산타가 있다고 믿으면 있는 것이고 친구들처럼 없다고 믿으면 없는 거야"라는 말을 해주었다. 남편과 나는 딸애한테 희망과 기쁨을 주는 산타의 실체에 대해서 스스로 알아차릴 때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딸애가 자라면서 바라는 선물의 단가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핸드폰이 없던 딸애가 그즈음 새로 나온 70만 원 상당하는 카메라 폰을 갖고 싶다고 했다. 너무 비싸니 다른 것으로 준비하자는 나의 만류에도, 남편은 딸애한테 산타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며 핸드폰을 사왔다.
다음날 새벽 거실로 나간 딸아이가 기뻐서 부르는 소리에 잠을 깼다. 꼭 가지고 싶어 하던 선물을 받은 딸애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산타할아버지는 내 마음을 너무나 잘 아는 것 같다고 했다.
그날 남편과 나는 딸애를 앉혀놓고 이제껏 너한테 선물을 준 산타는 엄마, 아빠였다고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처음엔 놀라며 의아해하던 딸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실 커가면서 친구들이 바보라고 놀릴 때마다 의심스럽긴 했었는데, 너무 완벽하게 선물을 주는 산타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날 딸애와 나는 같이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딸애는 엄마, 아빠가 사주는 선물인 줄 알았으면 이렇게 비싼 휴대폰을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기뻐해야 할 크리스마스 날에 눈물을 쏙 빼고 산타의 실체를 알게 된 딸은 그동안 엄마, 아빠 때문에 너무 감사했고 또 미안하다고 했다. 요즘도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그날을 떠올리며 웃음꽃을 피운다. 그리고 자기를 완벽하게 16년간이나 속게 해준 엄마 아빠처럼 딸애도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아이들에게 산타 역할을 해주겠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딸애한테 산타의 의미는 그해가 마지막이지 않았나 싶다. 이후로 더는 선물을 사기 위해 고민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딸애가 원하는 선물을 사느라 남편과 나는 서울로 대전으로 정신없이 다녔을 텐데, 그러지 않아도 되니 크리스마스가 정말 여유로워졌다. 올해는 집에서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인터넷에서 내려받은 영화를 보기로 셋이서 결정을 봤다. 덕분에 나는 많이 바빠질 것 같다. 남편이 좋아하는 새우튀김과 딸아이가 좋아하는 닭 꼬치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그때가 많이 그립다. 산타가 되어 선물을 사러 다니느라 동분서주하고, 딸애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느라 눈치를 보던 그 시절이 부모로서 가장 행복한 때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