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한국의 사찰

경기도 안성시 칠현산 칠장사

느림보 이방주 2010. 4. 5. 22:36

2010년 4월 4일

 

일요일이지만 산행 계획이 없다. 모처럼 딸이 와 있는데다가  내일이 청명이고 모레가 한식이기에 부모님 산소에도 가보고 싶었다. 한동안 산소에 가지 못해서 궁금하기도 하다. 아침 식사를 일찍 마치고 산소에 갔다. 따뜻하다. 선산 끄트머리에 차을 세우고 기슭으로 올라갔다. 조상님들의 산소가 총총이 모여 계시다. 우리 통정공파 산소는 거의 한 산줄기에 모셨다.

 

산소는 그동안 다녀가신 분이 없는지 설해 입은 나뭇가지가 부러져 떨어져 있었다. 하나하나 치우면서 부모님을 모신 곳으로 올라갔다. 가는 중에 증조부, 큰형님, 사촌형님의 산소를 지난다. 증조부나 증조모는 어떤 분인지 모른다. 증조부는 학식이 높으셨다 하고 증조모는 효열이 높으셨다 전해 오지만, 뵌 일이 없기 때문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큰형님에 대한 기억은 아련하다. 내가 스물세 살 때이므로 아주 옛날 일이 되었다. 그 때는 청천에 벼락이 내리는 것보다 더 큰 일이었지만 이렇게 세월이 지난 다음에는 역사처럼 심상하게 될 줄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분이 젊은 날에 세상을 버린 일로 해서 우리 통정공파는 지금도 흔들리고 있다. 사촌의 별세도 우리에겐 엄청난 일이었다, 그 분은 환갑을 지나 안타깝게도 암으로 세상을 버리셨지만 역시 우리 집안의 기둥이셨다. 뿐만 아니라 마을의 기둥이었다. 그 언덕에도 볕은 참 따스하다.

 

조부모님 산소에는 낙엽이 쌓였다. 대충 치워도 바람 불면 또 날아 든다. 부모님 봉분에는 쑥이 하얗게 머리를 내밀었다. 장갑을 끼고 하나하나 집으며 뽑았다. 쑥이 잘아 잘 집히지 않아 장갑을 벗고 뿌리까지 집으면서 뽑았다. 그래도 또 올라올 것이다. 어느 핸가 제초제를 뿌렸다가 두고두고 후회한 적이 있다. 볕은 참 따사롭다. 어머니는 마지막 조선의 여인이고 아버지는 근대의 길목에서 가정과 사회를 놓고 방황하신 분이다. 그러나 지천명에 이르러 천명을 정말로 깨달은 분이다. 종묘제례를 유네스코 문화재가 되도록 모든 고증을 거쳐 정립하셨고, 일제에 의해 땅에 묻힌 사직을 1988년에 이르러 역사적 고증을 거쳐 부활시킨 분이다. 88년 올림픽 때 종묘제례악의 밤을 총 지휘하셨다. 그리고 그해 사직 대제 부활 첫 제례 봉행 행사를 주관하셨다. 나라가 망하는 것을 종묘와 사직이 무너진다고 한다. 일제가 이 나라를 집어 삼켰을 때 종묘는 그냥 두었지만 종묘제례를 봉행할 수 없었고, 사직은 땅에 묻히고 말았다. 제례가 없는 종묘와 사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종묘와 사직을 실제로 부활하신 분은 바로 아버지이시다. 비문을 읽어 보면 지금도 감격스럽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사시는 동안 우리 형제 들은 어머니가 다 맡으셨으니 겪어야 했던 어머니의 고뇌는 상상할 수도 없다.

 

쑥을 다 뽑고 시골집을 돌아 보았다. 아무도 없다. 돌아 내려왔다.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딸을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고는 그 길로 칠장사로 향했다.  칠장사는 경기도 안성의 칠현산 아래에 있지만 광혜원에서 얼마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칠현산 칠장사>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말사이다. 창건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10세기 경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1014년(현종 5)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중건했다는 설이 있다. 사찰의 이름은 혜소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일곱 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고려시대 1383년(우왕 9)에 충주 개천사에 있던 고려역대실록을 이곳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389년(공양왕 1)에 왜구의 침입으로 전소된 것을 조선시대 1506년(중종 1)에 흥정이 중건했다. 1623(인종 1)에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원찰로 삼아 크게 중창했다.

1674년(현종 15) 권력자들이 장지로 쓰기 위하여 사찰을 불태웠으나 초견이 다시 중건했고, 1694년(숙종 20)에 다시 불에 탔으나 1704(숙종 30)에 석규가 대법당과 태청루 등을 지었으며, 1725년(영조 1)에 선진이 원통전을 세웠다. 1726년(영조 2), 1751년(영조 27)에도 약간 이축·증축했고 1877(고종 14)과 이듬해에 중건했다.

대웅전, 사천왕문, 원통문, 명부전, 나한전 등을 비롯하여 12동의 건물이 있으며, 혜소국사탑, 탑비, 철제당간 등의 유물이 남아 있다. 혜소국사는 속성은 이씨이며 이름은 정현인데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하여 10세 때 광교사 총회에게서 구법하고 17세에 영통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28세에 왕명에 의하여 대사가 되었으며, 칠현산에서 아란탑(阿蘭塔)을 세워 홍제관이라 하고 좌선하였다. 1054년 83세로 입적했다.

 

가경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공업단지 우회도로를 달려 진천 쪽으로 갔다. 길이 막히지 않고 시원하게 뚫린다. 광혜원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광혜원에서 칠장사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2차선 도로는 다니는 차가 별로 없어서 운전하기 좋았다.  주변 마을은 아주 평화스러워 보인다. 바로 칠장사에 도착했다.

 

 일주문

안내 표지판은 현대화

 경내 주차장에서 바라본 가람 배치

 지붕만 보이는 절집이 대웅전, 작은 건물이 원통전

 

주차장 바로 옆에 '칠현산칠장사'라는 현판이 붙은 일주문이 있었다. 어느 양식 없는 사람이 일주문 뒤에 주차해 놓았다. 고급 승용차이다. 고급 승용차가 더 질서와 예의를 지켜야 하지 않을까? 밖에서 바라보니 어쩐지 조금 속화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긴 요즘 사찰이나 어디이나 세상으로 들어 가든지 아니면 성역에 세상을 들여 놓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까. 일주문을 지나 차도인지 인도인지 걸어서 올라갔다. 그런데 차들이 사찰 안으로 질주한다. 올라가 보니 절 마당이 아주 넓고 차들이 여러 대 주차되어 있다. 마당을 지나 오른쪽 길로 대웅전으로 올라갔다. 범종각 아래 진도견이 도사리고 있다. 사찰을 지키는 개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족보 있는 듯한 개들이 사방을 지키고 있다. 아마도 이  절에 있는 보물을 탐하는 불청객들이 있는 모양이다. 요즘에는 사찰을 목표로 하는 손님들이 있다고 하니까 말이다. 아무튼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대웅전 앞 너른 뜰에는 때아닌 연등이 빼곡히 걸려 있다. 마당 중앙에 삼층 석탑이 있지만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등은 보기 좋았다. 대웅전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니 석불 입상을 모셔 놓았다. 그냥 눈으로 보아도 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우 아름답고 거룩하다. 그런데 좀 알 수 없는 것은 대개의 부처님의 경우 3존으로 모시는데 2존만 모셔져 있는 것이 의아했다. 마애불이나 불상은 대개 한 분 아니면 삼존을 모시는 것이 상례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잘 몰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석불입상 근처에는 거북 모양의 바위가 땅에서 반 쯤 솟아 있었다. 누군가 동전을 모아 탑을 쌓았다. 거북 바위라고 한다.

 

아내는 금방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절에만 가면 대웅전에 가서 합장하는 아내는 과연 무엇을 빌까? 사람들은 젊어서는 기원이 없다. 다만 소망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자꾸 기원이 생기는 모양이다. 대웅전 문앞에서 삼배를 올리는 아내와 벗어놓은 신발을 바라보았다.

 

< 안성 봉업사지 석불 입상>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竹山面) 칠장리 칠장사(七長寺)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보물 제983호. 전체높이 198cm, 입상높이 157cm. 원래 봉업사 터인 죽산면 죽산중학에 있던 것을 칠장사로 옮긴 것으로, 입상과 광배(光背)가 같은 돌로 조성되어 있다. 소발(素髮) 위에 큼직한 육계(肉髻)가 솟아 있고, 눈 ·코 ·입은 마모가 심하여 전체적인 인상이 잘 드러나지 않으나 대체로 원만하다. 양쪽 귀는 길게 표현되어 어깨에 닿을 듯하며, 목의 삼도(三道)와 어우러져 위엄을 자아낸다. 통견법의(通肩法衣)의 옷주름은 여러 겹의 원호(圓弧)를 이루어 자연스럽게 흐르며, 그 아래에는 군의(裙衣)가 양 다리 사이에서 지그재그 모양을 이룬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가슴부분까지 들어올려 손바닥을 가슴에 붙이고 있으며, 왼손은 자연스럽게 내려 법의자락을 잡고 있다.

 

전체적인 신체표현은 손이 다소 큰 편이기는 하나 머리 ·어깨넓이 등의 신체비례가 좋다. 광배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의 거신광(擧身光)으로 주위에는 화염무늬를 두르고 있다. 2중 테두리의 두광과 신광에는 바탕무늬가 전혀 새겨져 있지 않으며, 단지 두광 내에 여러 모양의 수인을 취하고 있는 화불(化佛) 3구가 배치되어 있다. 광배의 뒷면은 평평한 판석(板石)으로 아무런 조각도 새겨져 있지 않다. 당당한 어깨, 발달된 신체표현, 'U'자형의 유려한 옷주름, 그 밖의 조각기법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초기에 유행하였던 불상으로서, 이 지방 불상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안성 봉업사 석불입상

 

 거북바위

 아내는 부처님 전에

 

대웅전 앞에서 바라보니 화려한 연등 사이를 비집고 3층 석탑의 탑신이 올라와 있다. 연등은 아름답다.  삼층 석탑은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고려 전기에 제작되어 다른 곳에서 보관되었다가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봉업사 석불도 다른 곳에서 모셔오고 이 탑도 다른 곳에서 왔다고 하니 본래 이곳에 있던 보물은  어떤 것이 있을까? 대웅전과 원통전이 있다고 할 것이다. 또 철당간 지주가 있다. 모두 오래 된 것들이라 의미가 있을 것이다. 대웅전도 그렇고 원통전도 그렇고 오랫동안 단청보수를 하지 않아 낡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대로 멋이 있어 보였다.

 절 마당에 가득한 연등

연등의 아름다운 모습

 삼층석탑 안내 표지

 원통전 앞에 단풍나무 - 가지 끝이 빨갛다

대웅전

대웅전 옆에 있는 원통전

 

아내가 대웅전 참배를 마치고 나왔다. 나한전으로 올라갔다. 나한전은 작은 기와집이었다. 커다란 소나무 아래에 있는 맞배지붕인데 너무 좁아서인지 전면을 이어서 가건물처럼 이어 붙여 지었다. 사람들이 나한전에 들어가 참배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한전에는 스님도 없어 너무 허술하게 관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전 뒤에는 아주 잘 생긴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표지판에 의하면 나옹스님이 심었다고 한다 정말로 그렇다면 고려말에 살었던 700여년 전에 심은 것이 된다. 높이는 8m, 둘레는 약 2.1m라고 한다. 1997년에 이르러 보호수로 지정되었다고 하니 문화재에 대한 엄청나게 둔감한 우리의 시각을 증명하는 듯했다.  소나무는 그런대로 멋있어 보였다.

 나한전과 나옹송

 

나한전 옆에는 나한전보다 더 커보이는 혜소국사 사적비 비각이 세워져 있었다. 비석은 많이 훼손되어 보수한 흔적이 보였다. 그러나 훼손되지 않은 부분은 글자가 읽을 수 있을 만큼 또렷하게 보였다. 훼손된 부분을 복원한다는 것이 검은 시멘트와 잔돌을 섞어 콘크리트를 만들어 바른 것이다. 옆면에 돌자갈이 보일 정도이니 얼마나 허술한가 짐작할 만하다. 아마도 어느 개념없는 스님이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단순한 생각에서 그런 성의를 보인 것이 아닌가 한다. 비신의 옆면에는 깨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여의주를 가지고 있는 용이 양각으로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새긴 부분을 들여다 보니 완전히 오석이다. 그리고 조각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이런 훌륭한 문화재가 훼손된 것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비신 옆에는 귀부가 따로 떨어져 있고 비의 머리도 따로 보관되어 있다. 그 아름다움은 당시의 돌다루는 솜씨를 눈으로 보는 듯하다. 사람들이 이수에 동전을 던져 자신의 미래를 점치기도 한 모습이 보였다.

 

이 혜소국사비에는 전설이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이 이곳에 와서 절을 훼손하려하자 어떤 노승이 나타나 가등을 꾸짖었다고 한다. 가등이 화가 나서 칼을 들어 노승을 베었는데 스님은 간 곳이 없고 비신이 갈라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가등이 놀라 달아났다고 한다. 아마도 왜란에 자존심이 상한 절 사람들이 후에 지은 이야기가 아닐까? 그러나 가만히 훼손된 부분을 들여다 보니 칼에 베인 것처럼 상처 자국이 선명하다. 

 

<칠장사 혜소국사비>

 승려 혜소국사(慧炤國師 972~1054)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로서, 비문(碑文)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김현 선생이 짓고, 글씨는 전중승, 민상제 선생이 구양순체(歐陽洵體)로 썼다. 혜소 국사는 972년 (고려광종3)안성에서 출생하였으며, 속성이 이씨요 이름은 정현(鼎賢)으로 10세에 삭발 입산하여 광교사 충회에게 구법하고, 17세에 영통사에서 융철(融哲)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28세에 왕명에 의하여 고승으로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았고, 대사는 말년에 칠장사에서 수도하면서 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으며, 1054년(문종8)에 이 절에서 83세로 입적하였다. 이 비신의 높이는 3.4m, 폭은 1.28m이고, 귀부(龜趺)의 귀갑(龜甲)은 방원형, 비몸돌(碑身)의 양면에는 여의주(如意珠)를 가지고 노는 범 비슷한데 비늘이 있다는 짐승인 이호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고, 비 몸돌을 보호하기 위한 수호적인 의미와 장식적인 효과를 위해 비몸 위에 올려지는 부분인 이수에는 거북과 용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각각 장수를 상징하며, 물과 지상 천상의 세계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힘과 신통력을 지닌 동물로 이것은 비의 주인공인 혜소 국사의 영혼을 천상세계로 인도하며 비문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기 위한 의미를 가지며, 화려하고 생동감 있게 새겨져 있다.

 

아내가 산신각을 다녀오는 동안 나는 혜소국사비를 더 돌아 보았다. 멀리서 바라보니 산신각 지붕에는 비닐이 씌워져 있다. 절이 이렇게까지 가난할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혜소국사 사적비

 

 

 

 산신각- 지붕에는 비닐이 씌워져 있다.

 

내려오는 길에 바라보니 칠현산 기슭에는 산죽이 파랗다. 봄은 이미 싱그럽게 가까이 와 있다. 대웅전을 비롯한 가람 배치가 평화스럽기만 하다. 이 절은 민가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사바의 냄새가 밴 듯한 느낌도 들었다.

 산죽

나한전에 보이는 가람

 

부도전을 들러 절에서 먹는 샘물에 가보았다. 멀리서 보기보다는 깨끗이 정비되어 있다. 물을 마셨다. 속이 시원하다. 내장의 때가 다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명부전 벽에는 임꺽정과 병혜대사의 설화 벽화가 있었다. 벽화는 그렇게 훌륭한 솜씨는 아니지만 옛날의 이야기를 알만 하다. 또 궁예가 어릴 때에 활 쏘는 연습을 했다는 전설을 그려 놓기도 했다. 대개의 절집 벽화가 부처님의 일대기나 수행의 과정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에 비해 사바의 이야기를 벽화로 그린 점이 특이하다. 처음에는 좀 이상하다 생각되었지만 속세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불교의 존재는 의미가 없고 속세를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불교의 존재는 의미 없는 것이 된다.

 

사천왕문을 그냥 돌아 나오다 쳐다보니 문에 붙은 현판이 소박하다. 산문의 소나무 한 그루가 청청하다.

 

 부도전

 샘물

 임꺽정과 의형제들의 교화

궁예의 어린 시절

 

 천왕문

 산문에 선 고고한 소나무

 

문을 나와 절에서 바라보아도 별천지처럼 보이던 전원주택을 찾아가 보았다. 아내가 무던히 부러워 했다. 퇴직후에 이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뒤에는 소나무가 저렇게 우거져 있고 앞 뜰에 잔디를 깔고 꽃을 가꾸면서 말이다. 아이들이 오면 뛰어나가 반길 수 있을 만큼 진입로가 멀고 적당히 섭섭함을 드러낼 수 있을  만큼 큰 길이 멀고 ------. 그러나 너무 아름다워서 양택이 아니라 음택처럼 보였다.

 

여기에 이르자 꿈이 너무 큰지 오타가 심하게 나네. 내게는 다 부질없는 꿈인가 보다. 그만하자. 

 절에서 바라보이는 전원 주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