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에세이의 뜨락

에세이 뜨락 - 가늘은 골목 길- 이은희

느림보 이방주 2009. 12. 13. 10:21

<에세이 뜨락> 가늘은 골목길
이은희

 

중부매일 jb@jbnews.com

 

잔잔한 이야기 코너인 '에세이 뜨락'은 지역 수필가들이 1주일에 한 번씩 방문, 삶의 여정에서 건져올린 생각을 수필, 꽁트 등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작은 사랑방입니다.

골목을 돌고 돌다 막다른 집에 다다른다. 더는 나아갈 수 없는 끄트머리 집, 허름한 담장에 그린 그림이 돋보인다. 양 갈래 머리 아이가 시선은 땅에 박고 비탈길을 허정거리며 오르는 중이다. 얼핏 보면 전봇대를 오르는 것 같지만 아니다. 전봇대와 담장을 한 장의 여백으로 삼은 벽화는 달동네 풍경이다.

   
▲ 좁은 골목길을 걷자니, 귓전에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학교까지 버스 타고 가기엔 애매한 거리라 9년을 걸어 다녔다. 기억나는 골목 풍경은 슬레이트 지붕이나 녹슨 함석지붕, 드물게 기와를 올린 집들. 담장은 대부분 이끼 낀 강돌 위에 올린 콘크리트 담이거나 황토로 만든 담, 붉은 벽돌로 쌓은 담이 떠오른다. 지금 수암골 풍경과 엇비슷하다.
가파른 길을 오르는 아이 모습을 전봇대에, 좁은 골목을 두고 다닥다닥 붙은 집과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남자를 담장에 그린 것이다. 이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분명히 남다른 사람임이 틀림없다. 두 개의 대상을 하나로 표현한 것도 남다르지만, 끝없이 나아갈 수 있다는 발상이 놀랍다. 화가는 이와 비슷한 시절을 보냈거나 마음에 간직한 그리운 골목길을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청주 우암산 자락에 자리 잡은 달동네 마을은 '수암골'로 불린다. 한국 전쟁 때 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시간이 흘러 지붕과 바닥을 보수하고 쓰러진 담도 올리고 길도 냈지만, 예전의 모습을 거의 간직하고 있다. 벽에 쓰인 '근면, 자조, 협동'이란 오래되어 퇴색한 글자가 눈에 띈다.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지면 동네 분들이 하나둘씩 골목으로 나와 비질을 할 것만 같다.

청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동네, 수암골. 마을 초입 둥구나무 앞에 앉아 소소한 일상을 나누며 바라보는 풍경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으리라. 근처 학교에 다녔어도 이곳을 찾은 건 처음이다. 지금은 차가 다닐 수 있어 쉽게 오르지만, 도로가 없던 시절에 연탄과 물동이를 지고 오르기엔 쉽지 않은 길이다.

좁은 골목길을 걷자니, 귓전에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학교까지 버스 타고 가기엔 애매한 거리라 9년을 걸어 다녔다. 기억나는 골목 풍경은 슬레이트 지붕이나 녹슨 함석지붕, 드물게 기와를 올린 집들. 담장은 대부분 이끼 낀 강돌 위에 올린 콘크리트 담이거나 황토로 만든 담, 붉은 벽돌로 쌓은 담이 떠오른다. 지금 수암골 풍경과 엇비슷하다.

돌아보면, 나는 늘 앞만 보고 골목을 뛰어다녔다. 그곳을 지나갈 땐, 아침이거나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도 집으로 돌아갈 저녁 시간인 한유한 골목이었다. 오전의 골목은 정적에 휩싸여 두려움을 일으켰다. 내 뒤를 누가 따라오기라도 할양 겁이 더럭 났다. 두려움에 골목을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골목길'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더 있다. 막다른 골목에 붉은 벽돌담 집은 초등학교 2학년 시절 같은 반 남자 친구가 살았다. 늘 함께 등교하던 친구가 어느 날인가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지금 그 친구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한동안 골목이 텅 빈 양 허전함을 느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허름한 담벼락에 그려진 지도를 따라 '가늘은 골목길'을 걷고 있다. 처음 오는 사람은 어디가 어딘지 헤맬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일은 없다. 언젠가 한길로 만나지니까. 또 나그네는 집집이 대문 앞에 놓인 화분을 보고 미소를 지으리라. 앉은뱅이 채송화와 풋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 푸릇푸릇한 대파 등 아기자기한 화초를 가꾸는 집주인을 떠올릴 것이기 때문이다. 옥상의 소쿠리에선 겨울 반찬이 될 찐 풋고추와 무, 청둥호박을 잘게 자른 풋것들이 물기가 마르고 있다.

어디선가 청국장 끓이는 냄새가 풍긴다. 담을 넘어온 정겨운 냄새다. 갑자기 시장기가 돌며, 어머니의 장맛이 그리워진다. 예전에는 밥 지을 때면 이웃집에 어떤 반찬을 해먹나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울타리나 낮은 담 위로 음식이 오가는 도타운 정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어디 그런가. 아파트 들어오는 입구부터 현관까지 보완이 철저하다. 이제 내가 사는 곳에선 생각지도 못할 일이 되었다.

향수에 젖어 벽화를 감상하고 있다. 강돌 위에 그려진 자그마한 동물 발자국이 시선을 끈다. 이어 엉성하게 쌓은 벽돌담에 고개를 갸우뚱한 복슬강아지. 금세 집주인을 알아보고 구멍에서 강아지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그 집 대문이 열려 있어 안을 엿보니, 놀랍게도 담에 그려진 강아지가 반갑게 꼬리를 흔들고 있다. 집집에 살아있는 이야기가 벽화에 숨어 있는 성싶다.

쓸쓸한 달동네에 '추억의 골목 여행'이란 행사로, 사람들이 오가고 따스한 정이 흐른다. 담장이 낡고 깨지고, 바닥에 이끼와 새카만 더께가 앉은 우중충한 골목길이 벽화로 환해진 느낌이다. 골목길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은 그냥 그려진 것이 아니다. 옛정(情)이 그리운 이들이 그들의 생활 모습을 담아서인지 골목이 훈훈하다. 골목굽이를 돌아서면, 금방이라도 그리운 얼굴이 나타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