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에세이의 뜨락

에세이 뜨락 -발산리- 임형묵

느림보 이방주 2009. 12. 13. 10:11

<에세이 뜨락>발산리
임형묵

 

중부매일 jb@jbnews.com

 

어슴푸레한 골목길로 일 나갔던 사람들이 들어서고 집집마다 전등불이 켜진다.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한 집 건너만큼이다. 동네로 들어서는 길이 비좁아 큰길까지 되돌아 나와 차를 받쳐놓고 다시 동네로 들어섰다.

고향동네를 닮아 한 번 와보고 싶었던 발산리. 앞에는 하천이 흐르고 뒤로는 야트막한 산과 과수원이 에둘러 있다. 촘촘하게 지어진 집 사이로 비닐하우스가 보이고, 외양간에는 젖소들로 넘쳐난다. 마을이 도시에 붙어 있는데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동네가 둥그렇게 터를 잡은 데다 골목길이 여럿이라 숨바꼭질하면 좋을 것 같다. 오롯이 서 있는 종탑도 인상적이다. 종소리를 자주 듣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가슴도 따뜻하겠지.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개까지 덩달아 짖어댄다. 시끄러워도 시끄럽지 않다. 시끄러운 것 같은 데도 조용한 게 시골이다.

늦은 시간에 들러 고생한다며 할머니가 대소쿠리에 있는 홍시를 먹어보라고 건넨다. 옆집 아낙은 덩그런 쟁반에 녹차를 담아내왔다. 귀한 손님도 아닌데 며칠 전 왔을 때 인심 그대로다.

얼굴 안다고 곁에 붙어 참견하는 수염이 덥수룩한 할아버지의 너털웃음도 보기 좋다. 자전거를 외로 끌며 절뚝거리는 아픔을 앉고 있지만 오늘은 그러한 기색도 없어 보인다.

한 할머니는 땅에 닿을 듯한 구부정한 몸을 이끌고 내 집에 오신 손님 문전박대하면 안 된다며 마당까지 나오신다. 낯선 나를 타향에서 돌아온 아들인 양 반긴다. 할아버지가 암 수술을 하고 청주 모 병원에 입원했는데 어떤 음식을 해주면 좋으냐며 물어 오신다.

그래, 그게 고향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게 고향이다. 어쩌다 간 나그네를 너나 할 것 없이 반겨 주고, 다들 처음 보는데도 낯설어하지 않는 게 진짜 고향이다.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처럼 입 다물지 않고 짜증을 내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발산리가 다시 돌아갈 고향이다.

길이 비좁은데다 초가지붕이 즐비하지만, 발산리가 정겹다. 일터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서 나는 땀 냄새마저 구수하다. 땅거미가 드리워진 처마 밑에선 저녁연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머리에 수건을 둘러쓴 여인이 아궁이 앞에 앉아 있다.력어머니는 부지깽이로 타지 않은 등걸을 뒤적이신다. 덩달아 내 얼굴은 가을날 익어가는 홍시가 된다. 불이 사그라지면 어머니는 고구마 몇 덩이를 아궁이에 넣으셨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내게도 아궁이 차지가 왔다. 쇠죽을 끓이는 일이었다. 농촌에서 소가 없으면 힘을 못 쓴다. 장정 일 두 몫을 하는 귀하신 몸이라 일을 가도 사람 품삯을 받는다. 쌀겨나 콩깍지를 넣고 들깨꼬투리를 썰어 넣어주며 살을 찌워놓아야 다음 해 농사가 걱정이 없다.

그 시절엔 땔감도 귀했다. 낙엽까지 긁어 때다보니 나무를 하러 깊은 산으로 들어가야 했다. 체구가 작은 나는 멜빵을 잔뜩 움켜쥐어야 지게를 짊어지고 비탈을 내려올 수 있었다. 한번은 먼 산에서 나무를 해 가지고 산마루를 내려오는 중이었는데 동네에 상감이 나타났다는 전갈을 받았다. 면에서 나온 감시원이지만 너무나 무서워해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그 두려움에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동태를 살피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내려왔다. 그런 날이면 들떠 있던 기분이 싹 가시고 마는 것이다.

길에서는 쇠똥 냄새가 나고 주인의 옷에서는 젖소 냄새가 난다. 나도 그를 처음 보고 그도 나를 처음 보지만 오랜만에 만난 사람처럼 반긴다. 거무칙칙한 얼굴에 모자를 눌러 썼는데 소 돌보는 일이 곧 끝난다며 잠시만 기다리라 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고향동네 승현이 아버지를 닮았다.

승현이 아버지는 말이 어눌한데다가 행동까지 마뜩하지 않다. 농사를 짓느냐고 지어도 남기는 게 별로 없다. 수박농사가 짭짤한 해에는 참외를 심고, 고추가 비쌀 것이라고 심으면 되레 값이 내려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승현이네와 거꾸로 하면 돈을 번다고 농을 건다. 우리 내외가 과수원 대추를 몰래 따갔다고 뻔뻔한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잠시 후 소 외양간에서 나온 남자는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미안해한다. 장화를 벗고는 방문을 열면서 누추하지만, 어서 들어오라고 손을 잡아끈다. 그러더니 선뜻 윗목을 내어주고는 씻지도 않은 손으로 덥석 냉장고 문을 열고 음료수 한 잔을 따라 낸다. 농촌이라 대접해 줄 게 없다며 또 미안해한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 온다면 내 마음속에 있다고 말해 왔다. 발길 머무는 곳 어디일지라도 내 맘처럼 따스하지 않아서. 고향을 떠올리게 하며 향수를 달래주는 발산리! 어떤 여인은 생전 처음 보는 나를 붙잡고 신세 한탄을 하기도 했지만, 찾는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났다. 아궁이에서 갓 꺼낸 군고구마 같은 가슴이 따스한 사람들을 보았다. 내 몸에서도 젖소 냄새가 난다.

발산리에도 여지없이 공장이 들어서고 불 켜진 사무실이 눈에 들어온다. 동네 입구에 세워 놓은 차를 얼른 끌어다 뉘어놓아야겠다.
(2009. 9.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