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에세이의 뜨락

에세이 뜨락 -구리한 냄새가 장미 향기로 - 박종희

느림보 이방주 2009. 12. 13. 10:09

[에세이 뜨락]구리한 냄새가 장미향기로...
박종희

 

중부매일 jb@jbnews.com

 

여행을 가거나 백화점 같은 공공장소에 가면 화장실에 들르게 된다. 세월이 좋아지니 화장실 문화가 발달하여 오래 머물고 싶어질 때가 있다. 장거리 여행을 하다가 휴게소의 화장실에 들어서면, 달콤한 사과 향이나 장미향이 코를 찌른다. 더구나 갤러리처럼 미술작품이 걸려 있는 것을 보면, 마치 고급카페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도 있다.

우리가 자랄 때에는 화장실을 변소라고 불렀다. 그것도 요즘처럼 수세식이 아닌 재래식 변소였다. 시골에서 학교에 다녔던 나는 변소에 대한 공포증이 유독 심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학교에서 변소에 가는 일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 당시 무성했던 화장실에 얽힌 괴담 때문이기도 했지만, 볼일을 보려고 앉으면 적나라하게 내려다보이는 구조가 너무 무서웠다.

학생 수가 많으니 쉬는 시간이면 변소가 몸살을 앓았다. 화장실에 가려고 늘어선 줄이 교실 입구까지도 늘어졌다. 푸세식이라 냄새는 또 얼마나 구렸던가. 줄 서 있는 화장실 밖까지 암모니아 냄새가 났고, 전교생이 사용하는 변소이니 위생 상태는 말할 수 없이 지저분했다.

   
그런저런 이유 때문에 학교에서는 아주 급하지 않으면 화장실을 가지 않았다. 어떤 날은 참을 수 없어 화장실 문을 열었다가도 기겁을 하고 다시 돌아온 적도 있었다. 도저히 발을 들여놓을 엄두가 나지 않아 하교 시간까지 참느라 고생을 했던 일은, 그 시절을 살아온 여학생이라면 한두 번은 경험하지 않았을까 싶다.

친정집 화장실도 재래식이었다. 그나마 친정집의 변소는 그 시절의 다른 집에 비하면 아주 세련된 변소였다. 손재주가 좋으신 아버지가 볼일을 보고 나면 자동으로 뚜껑이 닫히는 변기의 뚜껑을 설치하셨다. 어디 그뿐인가, 아침마다 세제를 풀어서 안방 닦듯 닦아내는 엄마의 부지런함 때문에 구리 한 냄새도 별로 나지 않았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뒤편에 변소가 있어 친정집에는 요강이 세 개나 되었다. 두 개는 스테인리스 요강이고, 하나는 푸른색을 띤 사기요강이었다. 요강을 비우고 씻는 일은 작은 오빠 담당이었다. 여섯 형제 중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아 제비뽑기한 것이 안타깝게도 심덕 좋은 둘째 오빠가 걸렸다.

아침마다 찰랑거리는 요강을 비우고 예쁜이 비누로 냄새 나지 않게 닦던 작은 오빠가 심술이 났던지, 하루는 사기요강을 집어던졌다. 물론 그 모습을 본 사람은 다행히 나 혼자였다. 엄마한테는 요강을 씻다가 떨어뜨려 깨졌다고 했다. 조심성 없다고 엄마한테 잔소리를 듣긴 했지만, 다음 날부터 작은 오빠는 요강 두 개만 씻으면 된다는 즐거움에 나무라는 엄마 앞에서도 입이 귀에 가서 걸렸었다.

요즘 화장실은 예전처럼 생리적인 근심만 푸는 곳이 아니라, 마음에 휴식까지 취할 수 있는 곳이다. 화장을 고치고 머리를 만지고, 때론 전시해 놓은 작품도 감상할 수 있어 여자들에겐 더없이 편리하고 고마운 공간이다. 어딜 가던지 화장실은 들르게 되는데, 화장실이 깔끔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가본 화장실 중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화장실이 있다. 남편의 소개로 가본 "마실"이라는 아기자기한 카페의 화장실이다. 화장실 문을 여니 작은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마른 꽃을 담아 놓은 바구니와 책꽂이 가득 책이 꽂혀 있었다. 예쁘게 꾸며놓은 화장실은 더러 가 보았지만, 책상과 책꽂이가 있는 화장실은 처음이라 아주 오랫동안 잊히지가 않았다.

그 집에 가서 화장실을 들여다보면 주인의 성격과 생활습관이 어떤지 대충 알 수 있다. 주인 여자 얼굴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화장실만큼이나 잔잔하고 은은하게 꾸며 놓은 카페 내부도, 손길이 많이 간 듯 섬세하고 정갈했다.

그러나 이렇게 화장실이 아름답게 변했어도 이용하는 수준이 옛날 변소를 사용하던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 있다. 고급스럽고 우아하게 꾸며 놓은 화장실 바닥에 침을 뱉거나 물도 내리지 않고 나오는 사람을 보면, 다시 한 번 얼굴을 쳐다보게 된다. 화장실이 아무리 깨끗해도 사용하는 사람이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화장실로 지켜질 수가 없을 것 같다.

장미향기가 나는 화장실, 머물고 싶어지는 화장실 문화의 정착도 중요하지만, 이젠 사용하는 사람이 내 집 화장실처럼 깨끗하게 사용하여 어린 시절의 재래식 화장실을 떠올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박종희

(2009. 9.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