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에세이의 뜨락

<에세이 뜨락> 행운의 증표(박순철)

느림보 이방주 2009. 9. 4. 01:13

에세이 뜨락]행운의 증표

 

중부매일 jb@jbnews.com

 

신사임당이 그려져 있는 새(新) 지폐 한 장이 내 책상 서랍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다. 그 지폐를 보내 준 사람은 돈으로 생각하지 말고 행운을 가져다주는 증표쯤으로 생각하라고 했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내 눈에는 돈이 틀림없다.

고려 말 충신 최영 장군은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라고 했지만, 황금을 돌로 볼 만큼 내 인격이 고매하지 못하다. 돈을 다른 무엇으로 볼만한 혜안도 없다. 그 지폐를 바라보는 마음은 마냥 즐겁고 처음 나온 돈이라 신기하기만 하다.

그 증표는 멀리 대구에 사는 친구가 내 수필집을 받고 보내온 선물이다. 두툼한 봉투에서는 그 친구가 속해있는 종교계 지도자가 저술한 서적 한 권, 노트를 찢어서 쓴 편지가 나왔다.

   
나는 처음으로 5만 원권 지폐를 보았다. 친구는 돈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했으나 어쩐지 미안하단 생각이 든다. 책을 보낸 것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함의 안부였고, 전국에 있는 문우들로부터 저서를 받고 그 정성에 대한 자그마한 보답에서였다.
볼펜으로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쓴 편지는 감동, 그 자체였다. 안부를 묻고, 책을 보내주어서 고맙다는 내용, 내 수필집에는 고향 친구들의 이름이 많이 등장하는데, 왜 자기 이름은 없느냐는 장난기 섞인 대목도 있었다. 먼 훗날, 고희 때에는 막걸리 주전자를 앞에 놓고 옛날 어렵던 시절을 회상하며 흥얼거려 보자는 내용으로 말미를 장식했다.

이웃 마을에 살던 그 친구는 노래를 잘 불렀다. 어느 날 기타를 들고 나타난 일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마치 연예인 같았다. 지방에서 열리는 노래자랑에 출전하여 여러 번 상을 받기도 했다.

시골에서 그의 재능은 날개를 펼 수 없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는지 고향을 떠나 여러 직장을 전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더니 어느 종교에 심취하고, 그 단체에서 열심히 일한다는 소문이 들려오기도 했다. 친구는 오랜 신앙생활이 몸에 배었고, 그 갉고 닦은 마음을 바탕으로 이제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자수성가한 그의 의지가 부럽기만 하다.

편지는 두 장으로 그치지 않고 한 장이 더 들어 있었다. 그 안에는 투명 비닐봉투에 든 고액 신권이 나왔다.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친구야 돈이 아니고 5만 원권 지폐 한 장 보낸다. 내가 옛날 돈 모으기 하는데 은행에 부탁하여 첫 번째로 빠른 것(0955001?0955010) 10매 구입해서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끝자리 7번 챙겨 보낸다. 7번은 행운의 번호이고, 새 지폐를 지니면 돈이 굴러 들어온다는 말도 있다네. 그리고 무엇을 주고 싶은데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아 지폐를 선택하였으니 오해하지는 말게, 다음 책 속에 내 이름을 넣어달라고 아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네. (중략)

돈은 한 삶을 윤택하게 하기도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고위 공직 예비 후보자들이 청문회 받는 것을 TV를 통해 종종 보았다. 재산을 모으는 과정에 석연치 않은 일이 있으면 무수히 지탄을 받고 낙마하는 예도 많았다. 그러나 평생 김밥 장사를 해서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내놓는 천사 같은 마음씨를 가진 할머니도 있다. 돈은 버는 것도 어렵지만 쓰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나보다.

5만 원권 새 지폐! 가만히 그 돈을 들여다본다. 나는 처음으로 5만 원권 지폐를 보았다. 친구는 돈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했으나 어쩐지 미안하단 생각이 든다. 책을 보낸 것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함의 안부였고, 전국에 있는 문우들로부터 저서를 받고 그 정성에 대한 자그마한 보답에서였다.

내 눈이 화단 가에 얹힌 돌멩이에 멈췄다. 지금껏 눈길 한번 받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있던 돌이다. 흙 묻은 돌을 빼내어 물로 깨끗하게 씻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평범한 돌멩이에 지나지 않았다. 크기는 어른 베개보다 조금 작고 울멍줄멍한 게 볼품이라곤 하나도 없다.

스티로폼 상자에다 신문지를 채워가며 정성스레 포장한다. 친구는 돌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좋은 돌을 얻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고 집에는 상당량의 명품 수석(水石)도 있는 것으로 전해 들었다.

나는 돌을 볼 줄 모른다. 그저 모두 같은 돌로 보일 뿐이다. 저 돌도 시골에서 강에 다슬기 잡으러 갔다가 주워 온 것이다. 주인을 잘 만났다면 좌대에 앉아서 편안한 세월을 보냈을 것이지만 나 같은 사람 만나서 물 한금 얻어먹지 못하고 눈길 한번 받지 못했으니 서운했으리라. 언젠가 지인이 달라고 하는 것을 무슨 마음에서인지 주지 않고 내버려두었던 돌이다. 이제 새 주인을 만나면 그윽한 눈길도 받고 대우도 받게 되리.

친구는 돌을 받아들고 어떤 모습을 지을까. 행운의 증표를 보내준 사람에게 돌멩이를 보냈으니 서운하다고 할까? 아닐 것이다. 돈을 돈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한 사람이니만치 나를 만난 것처럼 반길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