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에세이의 뜨락

<에세이 뜨락> 옛날 다방 - 박종희

느림보 이방주 2009. 5. 29. 08:01

옛날 다방

 

중부매일 jb@jbnews.com

 

잔잔한 이야기 코너인 '에세이 뜨락'은 지역 수필가들이 1주일에 한 번씩 방문, 삶의 여정에서 건져올린 생각을 수필, 꽁트 등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작은 사랑방입니다.

"노스탤지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모든 것이 마냥 그립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문인들의 모임이 있는 날이다. 낯가림이 심한 성격 탓에 모임 한 군데 들지 않던 내가,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두 군데의 문인단체에 가입했다. 충북에 있는 원로문인들이 모인 곳이라 얼마 동안은 적응되지 않아 후회스럽기도 했는데, 글을 쓴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몇 번의 모임을 참석하고 나니 소속감이 들고 책임감도 생겼다.

퇴근시간을 앞두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인데 다들 오셨다. 깔끔한 한정식으로 저녁을 먹으며 여름을 지낸 밀린 이야기와 근황으로 조용한 수다가 시작되었다. 신입회원의 인사와 다음 달 치를 큰 행사 이야기로 회의를 진행하며 웃음꽃을 피우다 보니, 역시 여자들이 모인 자리라 이야기꽃이 끝이 없다. 회의를 마치겠다는 회장님의 말씀에도 아무도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오늘 집에 가기 싫으신가요?" 하시면서 회장님께서 먼저 일어나신다.

멀리서 온 신입회원을 그냥 보내는 것이 아쉽다며 가까운 찻집에 가서 차나 한잔하자고 한다. 마침 가까운 곳에 오래된 찻집이 있어 들어서니 한방차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차 달이는 냄새가 좋다고 너나 할 것 없이 찻집에 대한 예찬으로 소란스럽다. 시대에 발맞추어 하루가 다르게 들어서는 멋진 라이브 커피숍 때문에 밀려난 옛날다방 주인이 혼자서 주문을 받고 차를 다린다.

   
▲ 낡아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소파와 의자 몇 개 놓인 다방의 주인 여자는, 한꺼번에 밀어닥친 회원들이 반가워 입을 다물지 못한다. 커피도 맛있지만 오래도록 달여서 거른 냉 대추차가 맛있다며 대추차를 마시라고 한다. 열 명이 넘는 회원들이 모두 냉 대추차를 시켜놓고 나니, 이제는 사라져 버린 옛날다방에 앉아 있는 것이 얼마 만인가 싶다.

낡아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소파와 의자 몇 개 놓인 다방의 주인 여자는, 한꺼번에 밀어닥친 회원들이 반가워 입을 다물지 못한다. 커피도 맛있지만 오래도록 달여서 거른 냉 대추차가 맛있다며 대추차를 마시라고 한다. 열 명이 넘는 회원들이 모두 냉 대추차를 시켜놓고 나니, 이제는 사라져 버린 옛날다방에 앉아 있는 것이 얼마 만인가 싶다.

결혼 전 직장생활을 할 때였다. 80년대였으니 20년이 훌쩍 지난 것 같다. 그 시절엔 음악다방이 많았고 디제이가 있었다. 장발을 한 디제이들이 멋진 목소리로 음악을 배달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커피를 마시러 가는 것보다 디제이들을 보러 가는 친구들도 많았다. 알록달록한 남방셔츠를 입고 음악을 선곡하는?디제이한테 빠져 다방에서 살다시피 하더니, 결국은 디제이와 결혼을 한 친구도 있다.

퇴근 후 버스 시간을 기다리느라 책 한 권 들고 도서관처럼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는 나를 위해, 한구석에 내 자리를 비워두던 주인이 고맙기도 했다. 50명이 넘는 직원들이 아침마다 시켜먹는 모닝커피가, 다방매출에 노른자위라는 것을 계산 빠른 주인 여자가 모를 리 없었던 것이다.

눈썰미 좋은 주인의 배려 때문인지 내가 들어가면 음악도 바뀌었다. 고맙게도 책을 읽으며 신청했던 음악을 기억하고 틀어주었다. 빽빽한 레코드판에 둘러싸여 있는 어두운 디제이 상자 안에서, 웬만한 성우만큼 목소리가 근사하던 디제이는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늙어가고 있을까. 하얀 흰머리 대신에 멋진 아바타 모습으로 인터넷카페에서 음악을 배달하는 것은 아닐지.

원두커피가 주 메뉴가 되어버린 요즘엔 크림과 설탕을 듬뿍 넣어 달착지근하게 끓여주던 다방 표 커피도 그립다. CD 한 장이면 어떤 음악이든지 쉽게 들을 수 있는 디지털시대에서 아날로그시대를 추억하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니, 시간을 돌려놓은 것 같다. 이십 년 정도의 나이를 뛰어넘는 세대인데도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라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연세 드신 선생님들도 디제이들을 좋아했다고 했다.

주인여자가 자랑하던 냉 대추차가 오니 시끌벅적하던 대화가 잠시 중단된다. 대추를 잘 달여 잣을 동동 띄운 대추차에서 풍기는 향기가 차 색깔만큼이나 진했다. 원래 대추는 입에도 안 되는 나도, 차의 은은한 향에 끌려 한 모금을 마셔보니 달콤하고 깊은맛이 입에 착 붙는다. 대추차를 한 모금씩 마시고 난 소감을 놓칠세라 모두 한 마디씩 대추차에 대한 자랑이 늘어진다. 무엇에든 의미를 붙이길 좋아하는 문인들만의 변명(辨明)이다. 먼 길마다 않고 처음 나온 신입회원인 J 선생도 대추차가 맛있다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모임이 아니면 앞에 계시는 분들이 얼마나 어려운 분들인가. 그분들을 보면서 내가 할머니가 되어 있을 20년 후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나도 그 나이가 되면 선생님들처럼 고운 모습으로 글을 쓸 수 있을는지. 일흔이 넘었지만, 아직도 소녀 같은 외모를 가진 친정어머니 처럼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을지. 대추차와 함께 끝이 없는 이야기로 소리 없는 밤이 깊어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