것대산이나 바라보며 -병상에서 9일 째
2월 21일 (토)
지난밤 눈보라가 쳤다. 유리창 밖에 보이는 세상이 온통 하얗다. 청남학교 뒷산에 둥그런 등성이에도 눈이 쌓였다. 산이 꼭 옛날 민둥산이던 고향의 언덕 같다. 밭이 있고 커다란 참나무 위에 까치집이 얼기설기 있는 그런 어린 시절 고향의 언덕 말이다. 운동장에도 눈이 쌓였다. 병원 마당에 주차된 차들이 하얗게 눈을 뒤집어 쓰고 있다.
통증은 없다. 어디에도 없다. 가슴의 통증도 없어졌다. 기침도 없다. 그러나 몸을 말할 수 없이 흐느적거린다. 꼿꼿하게 서려 해도 흐느적거리고 또렷하게 말하려 해도 말이 샌다. 고량주보다 더 독하게 불붙는 의지를 가지려 해도 마음은 흐느적거리는 육신을 따라 한없이 깊은 땅 밑으로 가라앉는다.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주사를 두 대 맞았다. 생리식염수 주사액을 서둘러 두 병을 맞고 두 병을 매달았다. 포도당 주사를 갈아 매달았다. 매달린 병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희한한 생각이 든다. 고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방울방울 떨어져 내 몸 구석구석 어디론가 들어간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주사바늘 꽂은 자리가 부어 오르고 가렵다. 그것도 기술일 거라는 생각은 여전하다. 링거를 맞는 자리가 이렇게 아프고 부어 오른다면 몇 달을 병원에서 그걸 꽂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견딜까? 링거만 바라보면 정말 아프다. 짜증난다.
형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다 나았으니 오시지 말라고 했는데 오후에 두 분이 오셨다. 형도 오셔서 형님과 만났다. 이용표 선생이 저녁에 왔다. 친구 연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말을 안할려다가 입원 중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증평에 있다고 했다. 나는 증평 찐빵이 생각나서 좀 사오라고 했다. 잠시 후에 증평에서 빵을 사가지고 왔다. 따뜻했다. 사람들의 마음도 다 이렇게 따뜻하다. 한참 동안 놀다가 갔다.
저녁에 잠도 잘 잤다. 팔봉 김기진 연구 (이효석논문) 를 다 읽었다. 머리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어느새 토요일 참 쉽게 간다. 아무래도 월요일에 나가는 건 어려울 것 같다. 아무래도 어렵겠지? 묻지 않았다. 아무래도 바보같은 물음일 것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