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에세이의 뜨락

<에쎄이 뜨락> 밥 (이은희)

느림보 이방주 2008. 11. 7. 14:34

 

중부매일 jb@jbnews.com

 

잔잔한 이야기 코너인 '에세이 뜨락'은 지역 수필가들이 1주일에 한 번씩 방문, 삶의 여정에서 건져올린 생각을 수필, 꽁트 등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작은 사랑방입니다.

모녀간의 감정은 절정에 달한다. 철없는 딸이 어머니에게 모질게 쏘아붙인다.

"엄마는 밥밖에 모르지!"라고 딸은 할 말을 다한 듯 어머니의 회초리를 피해 밖으로 뛰쳐나간다. 어머니는 식탁으로 돌아와 눈물을 흘리며 습관처럼 밥을 꾸역꾸역 퍼먹는다. 이어 부르짖는다. "그래, 이 에미는 무식해서 밥밖에 모른다!"

   
▲ 어떠한 이유로 서로 소원한 관계나, 첫 만남에서 일의 처리는 더디고 서먹하다. 그러나 밥 한 끼를 같이하고 나면 어느새 부드러운 사이로 변해 있다. 그렇게 밥은 알게 모르게 끈끈한 정(情)을 낳는다. 한솥밥으로 형제간의 정, 부부간의 정, 직원 간의 정은 더욱 돈독해진다. 남을 염려하며 헤아리는 그 마음은 타국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어린 생명을 살리기도 한다.

딸에겐 밥 먹는 일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세상에는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더 많다. 하지만 철없는 딸이 어미 속을 어찌 알겠는가. 어려운 살림에 따스한 밥 세끼를 먹이려 아등바등 살아온 어머니의 인생을 알 리 없다. 아니 그 삶을 이해한다면 함부로 대들 수가 없다.

나는 무심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밥'이란 대사에 마음이 쏠렸다. 금세 눈두덩이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본 딸애가 '엄마는 또 청승'이라고 놀려댔다. 생선장수인 어머니가 홀로 딸들을 키우며,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다. 장면 하나하나 절절한 대사가 가슴을 울리는데, 신파조로 보고 넘기는 딸아이의 가슴은 없는 듯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하얀 쌀밥을 호호 불어먹는 일, 그것이 소원이었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유년시절, 하얀 쌀밥은 행복한 꿈이었다. 아버지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 장기간 입원함에 끼니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물로 배를 채우던 그날 밤을 잊을 수가 없다.

'밥'밖에 모른다는 딸의 대사가 내 가슴을 울린 건 '밥'의 상징적 의미를 모르는 철없음이다. 아니 자식들의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해 안절부절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과 겹쳐졌기 때문이다.

요즘 직장인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아침밥을 거르는 풍조가 늘고 있다. 밥이 없어서 굶는 것이 아니라 즉석식, 간편식의 대용 식품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인지 쌀 소비량이 급격히 떨어지고, 탄수화물이 부족한 병이 늘어난다는 놀라운 소식도 있다. 사람들의 심리가 너그럽지 못하고 과격하며 조급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성싶다.

그리고, 굶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면 밥을 배달하는 프로가 생겨났겠는가? 라디오 아침 방송 중에는 '밥 쇼! 밥 먹고 합시다'라는 프로가 있다. 그런가 하면, 굶고 등교한 학생들에게 밥을 학교까지 가져가 퍼주며 식사하는 방면을 생동감 넘치게 보여주기도 한다. 아침밥을 거르고 일선에 뛰어든 남녀노소를 위해 준비한 '밥 쇼'라고 하니 눈길을 끌만도 하다. 유년시절을 돌이켜보면 상상도 못할 프로그램이다. '밥'에 관하여 세상은 얼마나 너그러워진 것인가.

사람 사이의 정은 한솥밥 먹은 밥그릇 수에 비례하지 않을까 싶다. 직장과 군대에서 은어로 쓰이는 '짬밥'수가 그것이다. 동료든 동기든 한 곳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하니 대부분 친밀해진다.

짧은 시간이지만 소설 '사랑방손님과 어머니'의 등장하는 인물이 그렇다. 그들은 한솥밥으로 애모의 정을 품지 않았던가. 농촌을 이끌어 온 두레도 마찬가지다. 노동으로 땀을 흘리고 나면 새참으로 두레상에 따스한 '보리밥'이 오른다. 12첩 반상은 아니어도 청국장에 풋나물 넣어 고추장에 썩썩 비벼먹는 가운데 훈훈한 인심과 정은 깊어갔다.

요즘 IMF를 능가하는 어려운 경제 사정이 길게 간다고 하여 걱정들이다. 거기에 공직자들의 불법 쌀 직불금 사태까지 일어나 농민의 가슴을 울리고 있으니 말이다.

선량한 농민들은 마치 현대판 보릿고개를 맞은 양 힘들고 고되다. 그리고 부지기수로 늘어나는 것은 실업자, 부모 있는 고아, 노숙자다.

일부 자선단체에서 꼬리를 무는 그들의 식사를 해결하기에 턱없는 숫자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소외된 이웃에게 따스한 밥 한 끼라도 나눌 때이다.

밥이란 고유명사에는 어머니 품속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이 있다. 엄동설한에도 든든히 밥을 먹고 일터로 나가면 덜 춥다는 것을 몸이 먼저 말한다. 그리고 밥은 사람의 관계를 부드럽게 해주는 윤활유다. 어떠한 사유로 말미암아 서로 소원한 관계나, 첫 만남에서 일의 처리는 더디고 서먹하다. 그러나 밥 한 끼를 같이하고 나면 어느새 한결 부드러운 사이로 변해 있다. 그렇게 밥은 알게 모르게 끈끈한 정(情)을 낳는다. 한솥밥으로 형제간의 정, 부부간의 정, 직원 간의 정은 더욱 돈독해진다. 남을 염려하며 헤아리는 그 마음은 타국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어린 생명을 살리기도 한다.

밥은 '밥심'보다 더 큰 사랑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 나는 다용도로 쓰이는 '밥'을 좋아한다. 가슴 따스한 사람을 만나면 서슴없이 이 한마디를 꼭 하고 싶다.

"우리 언제 따스한 밥 한 끼 같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