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의 가을 4 -곤드레밥-
9월 22일
봉평에서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이렇게 식도락 여행은 한계가 있다. 지난 2004년 여름 정선 여행은 1박 2일로 잡았기 때문에 배가 여유 있었으나, 이번 여행은 단 하루이니 경비는 절약되어도 정선 음식을 다 섭렵할 수는 없다.
비는 그치지 않고 봉평의 먹거리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우리 일행은 할 수 없이 여유없는 배를 원망하며 청주로 돌아오기로 했다. 아침에 비행기재를 넘을 때보다는 빗줄기는 많이 가늘다. 운전이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봉평에서 장평 나들목으로 영동선을 타고 들어가면 바로 원주다. 여주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충주나 연풍으로 빠질까 하다가 친구가 남원주에서 목계로 가는 길이 도로 공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라고 해서 그 길을 택하기로 했다. 영동선의 강릉으로 향하는 하행선은 차량이 빼곡하다. 영동선에 들어서자 자주 다녀서 낯익은 길이고 비도 그쳐 운전은 훨씬 수월하다.
추석을 쇠러 가는 차량들이 도로를 메웠다. 사고 현장도 보인다. 사람들은 고속도로에 들어서면 서두른다. 그건 나도 별수없지만 왜 그렇게 경쟁을 하고 끼어드는지 모른다. 영동선과 중앙고속도로가 교차되는 남원주에서 잠시 중앙고속도로를 빌리다가 남원주 나들목으로 빠져 네비게이션에 연세대를 넣고 충주쪽으로 갔다. 흥업 교차로를 지나는데 동서 생각이 났다. 때마침 아내는 동생에게 전화를 한다. 저녁을 먹고 가라는 듯 하다. 그 얘기를 들으니 갑자기 배가 허전하다. 정선의 입맛은 이미 저 세상으로 갔나 보다. 정선에서 곤드레밥 식당 앞까지 갔다가 배가 여유가 없어 그냥 돌아 섰다. 그래서 사진을 찍지 못했다. 어쩔거냐기에 나는 원주에도 곤드레 밥이 있나 물어보라고 했다. 처제가 아마도 그리로 안내한다고 하는 모양이다. 처제에게 미안하지만 속 맘으로는 갔으면 했다. 처제는 언니에게 더덕도 줄게 있다고 하는 모양이다. 처제는 언니를 만났으면 하고 자꾸 되돌리기늘 권하는 것 같다. 정선에서 더덕은 조금 사는 걸 내가 봤다. 그런데 저쪽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그래!"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차를 돌리라고 했다. 나는 길이 좁아지기 전에 이미 어두어지는 길에서 불법 유턴을 했다. 차가 한 번에 돌려지지 않아 실랑이를 했다. 무쏘는 다 좋은데 불법 유턴에 약하다.
새로 택지를 조성한 판부면 지역에 건물을 지어 건축사 사무실로 쓰면서 살림을 하는 동서네 집은 갈 때마다 찾기 어렵다. 내가 길눈이 어두운 탓도 있지만, 수시로 건물이 들어선다. 그래서 갈 때마다 주변이 다르다. 지난 여름에는 어렵지 않게 찾았는데 한참을 헤매서 아내에게 원망을 들었다. 날은 어둑해지는데 처제 차를 따라 식당으로 갔다.
원주의 곤드레 돌솥밥(6000원)
주문을 하고 이내 나온 곤드레밥에 나는 약간 실망을 했다. 상차림이 너무 고급이다. 곤드레비빔밥이 아니라 곤드레 돌솥밥이다. 게다가 쌈밥의 형식을 곁드렸다. 반찬이 여러가지이고 된장찌개에 정선곤드레비빔밥의 비빔 된장을 흉내낸 쌈장도 있다. 쌈으로 나온 야채는 상추, 노란 배추고갱이, 양배추, 호박잎, 깻닢도 있고, 그외 최근 중국에서 들여온 쌈이다. 이런 쌈은 예전에는 정선에서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반찬도 김치와 깍두기 된장찌개 외에 도라지, 비름나물, 가지볶음도 있다. 곤드레밥은 곤드레 나물을 밥 위에 펼쳐 넣은 다음 그대로 밥을 지었다. 곤드레 나물은 묵나물이 아니라 바로 얼마 전에 뜯어 말린 것 같았다. 푸릇푸릇한 기운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삶아 말려서 검은 나물이 하얀 밥과 뒤집혀 섞여야 제맛이 날 것 같은데 말이다. 양념장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없다.
음식은 푸짐하고 고급스럽다. 그렇지만 식당 주인은 음식에 대한 철학도 없이 고객 확보에만 신경을 쓴 것이다. 곤드레밥 고객도 확보하고, 쌈밥 고객, 비빔밥 고객, 돌솥밥 고객에게도 눈짓을 한 밥상이다. 아내나 친구는 푸짐한 상에 환성을 질렀지만 나는 사진을 찍을 수도 없고, 정선 곤드레밥의 투박하고 단순하면서도 서민적인 정서를 찾을 길 없어 아쉬웠다. 정선 장터 곤드레밥집의 양념 간장과 비빔 된장이 눈에 선하다. 그 감칠 맛이 입안에 뱅뱅 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렇게 차린 밥상이 변하는 우리 입맛에 더 맞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렇게 깨끗한 밥상을 원할 것이다. 세월따라 음식상도 고객의 입맛을 맞추어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이런 발전적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 음식이란 영양이 좋고 입맛에 맞으면 그만 아닌가? 정선의 곤드레밥은 과거 가난했던 시절에 부족한 쌀을 곤드레 나물로 채운 것이다. 그런데 쌀이 부족하지도 않은 지금 그 시절의 추억을 그리며 억지로 곤드레 나물로 배를 채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 추억은 한두 번이면 족할 것이다. 그런데도 3년전 먹은 정선 시장의 곤드레밥이 그리운 것은 무엇 때문인가?
다른 이들은 쌈을 싸며 흥겨워 했지만, 나는 간장에 돌솥밥을 비벼 철학없는 식사를 했다. 돌솥에 물을 부어 숭늉까지 만들어 먹은 다음 커피를 받아 마시니 금상첨화(?)였다. 이렇게 까다로운 형부를 대접하느라 처제가 얼마나 힘들 것인가? 처제는 갈비 한 바구니와 더덕을 주는 모양이다. 아내 웃음 소리가 더 커진다. 차를 돌리게 했을 갈비는 꽤나 묵직했다.
출발하려고 하니 멎었던 비가 다시 떨어지기 시작한다. 충주가 가까워지자 비는 더 쏟아진다. 남들은 명절이다 해서 바쁜데 공연히 미안스럽다. 그러나 내일은 새벽에 청주를 떠나 영광 불갑사 꽃무릇 축제를 보고 법성포에 가서 굴비 정식을 먹기로 친구와 약속했다. 굴비 정식을 머릿속에 그리니 피로도 사르르 가신다.
(2007. 9. 22)